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C. 마셜 (문단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정규 소령으로 복귀했다.[* 전쟁 시기에는 전시 임관도 많았고 장교의 수도 부족했기에 승진이 빨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기에 군축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장교들을 예편시키거나 전쟁 이전의 계급으로 강등시켜서 수요를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계급 특진]] 참고.] [[전간기]][* 프랑스의 포슈 장군이 말한 '''20년간의 평화'''. 1차 세계 대전 종전일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까지([[1918년]]~[[1939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말로는 '''해군 휴일'''. ]에는 육군부 작전처 교육훈련국에서 근무했으며, 주로 훈련계획장교로 근무했다.[* 이 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군을 빠른 시간 안에 재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1924년 9월부터 1927년 5월까지 [[톈진 조계#s-10|톈진의 영국 조계]][* 구 미국 조계. 1901년 영국으로 넘어갔다.]에 주둔한 제15보병연대의 연대장 대리를 맡았다. 군벌 내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투를 경험할 일이 거의 없었으나 1925년 12월 북방 군벌인 리징린과 펑위샹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펑위샹의 군대가 톈진으로 진입하면서 한때 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질 뻔하기도 했다. 당시 마셜 휘하에서 복무했던 사람이 훗날 장제스의 참모장을 맡게 되는 조지프 스틸웰(당시 소령)이었다. 마셜은 중국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귀국 후 미 육군대학의 교관을 맡았다. 이때가 중국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마셜은 이후로도 중국에 대한 시각이 이때의 부정적인 경험에서 일신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마셜은 훗날 [[중일전쟁]] 당시 참모장으로 비슷한 시각을 가진 [[조지프 스틸웰]]을 참모장으로 추천해서 보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23년]]에는 중령, [[1933년]]에는 대령이 되었고 참모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후잡질 때문에 좌천당했다. 이후 [[1935년]] 맥아더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1936년]]에 [[준장]]으로 승진하면서 30여 년 만에 [[별]]을 달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